1. 독도를 지킨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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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안용복
"어찌 너희 감히 우리 땅을 범하느냐" <숙종실록>에 따르면, 안용복은 1696년 봄에 16명의 어부들을 모아 울릉도로 건너갔다. 울릉도에는 일본 어선들이 와서 정박해 있으므로 안용복이 외치기를, "울릉도는 본래 우리의 경지인데 왜인이 어찌 감히 월경하여 침범하는가. 너희들을 모두 묶어 마땅하다." 라고 꾸짖었다. 이에 일본인들은 말하기를 "우리는 본래 송도(독도)에 사는데 우연히 고기잡이를 나왔다가 이렇게 되었으니 마땅히 본소로 돌아갈 것이다."라고 하였다.
"송도는 곧 우산도(독도)인데 역시 우리나라 땅이다. 너희들이 감히 송도에 산다고 하느냐." 라고 꾸짖고, 이튿날 새벽 우산도로 들어가 보니 일본 어부들이 가마솥을 걸고 물고기를 조리고 있으므로 막대기로 부수고 큰소리고 꾸짖으니 일본인들이 모두 배를 타고 본국으로 돌아갔다.
안용복 등은 그 길로 일본 어부들을 쫓아 일본의 오키도로 들어갔다. 오키도주가 찾아온 이유를 묻자 안용복은 큰소리로, "수년 전에 내가 이 곳에 들어와 '울릉, 자산'등의 섬이 조선지계임을 확인하고 관백의 문서를 받아간 일이 있는데, 이 나라는 정식이 없이 또 우리의 경지를 침범했으니, 이것이 무슨 도리인가." 라고 말하였다.
이제 오키도주는 안용복의 항의를 자기의 상관인 백기주 태수에게 보고하겠다고 말하였다.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백기주로부터 소식이 오지 않았다. 안용복 등은 이에 직접 백기주 태수와 담판하기로 결의하였다.
안용복은 조선의 울릉자산양도감세장이라 가칭하고 백기주에 들어가 태수와 담판하기를, "전날 양도의 일로 문서를 받아 내었음이 명백할 뿐 아닐, 대마도 주는 문서를 탈취하고 중간에 위조하여 여러 번 왜차를 보내서 불법으로 횡침하니, 내가 장차 관백에게 상소하여 죄상을 낱낱이 진술하겠다."라고 따졌다.
백기주 태수는 상소를 허락함과 동시에 안용복에게 "양도(울릉, 자산)가 이미 당신네 나라에 속한 이상 만일 다시 국경을 넘어 침범하는 자가 있거나, 도주가 혹시 횡침하는 일이 있으면, 국서를 작성하고 역관을 정하여 들어보내면 마땅히 무겁게 처벌할것이다." 라고 약속하였다.
백기주 태수는 몇 달 전에 관백이 울릉도와 자산도를 조선 영토로 확인하고 대마도주에게 조선 조정에 형부대보를 보내어 알리도록 명령했을 때 그 자리에 배석했던 것이다.
안용복의 활동은 큰 성과를 거두었다. 대마도주는 이듬해인 1697년 1월에 형부대보평성상을 조선에 보내어 관백의 결정을 알리고, 1699년에는 최종 외교문서의 교환으로 일본측에서도 울릉도와 독도를 조선 영토로 재확인하는 모든 절차가 완료되었다.
그리하여 17세기 말 울릉도와 독도를 일본 영토로 만들려던 일본측의 시도는 완전히 실패하고, 울릉도와 독도가 조선 영토임이 양국간에 거듭 확인되었다.

(2) 이규원
조선시대의 무관.
1882년(고종 19)에 울릉도 검찰사가 되어 울릉도(독도 포함)를 시찰하고 돌아온 이규원은 천혜의 보고인 울릉도와 독도에 왜인들이 침입, 벌목하고 있으며 자신들의 땅인양 입표까지 한 것에 분개하여 일본공사에 항의함은 물론 일본 외무상에 항의문서를 발송할 것을 제의하였다.
이에 감동한 고종은 그간의 공도정책을 버리고 울릉도 개척에 착수하는 한편 일본 정부에 재차 항의하도록 하였다.
조선왕조의 공도정책으로 무인도가 되어 있던 울릉도에 현지 조사를 한결과 일본 어부들이 출어하여 벌목하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 이들을 문책하여 돌려 보내었다.
그후 '이규원 울릉도 검찰일기'를 조정에 제출하여 이를 통해 조정은 일본에 항의 공문을 보내고 울릉도에 주민을 이주시키도록 조치했다.

(3) 홍재현
홍재현은 조선시대 호조참판을 지내다 울릉도에 유배된 조부를 따라 울릉도에 정착했다.
그는 독도에 나타난 왜인들을 물리치는데 그치지 않고 직접 일본으로 건너가 독도가 조선의 영토임을 확고히 밝히고 돌아왔다.
그후 계속된 일본의 독도 침입은 그의 아들 홍 종욱이 대를 이어 막아냈으며 손자인 홍순칠은 그 유명한 '독도의용수비대' 대장이었다.
홍재현 일가는 3대에 걸쳐 독도를 지켜온 산증인들이었다.

(4) 홍순칠
'독도의용수비대'의 3년 동안의 활약상은 전설적인 실화로 전해져 내려온다.
53년 울릉도 출신 전역 군인들이 상사 출신인 홍순칠(87년 작고)씨를 대장으로 하여 '우리 시대 마지막 의병'의 기치를 내걸게 된 것은 일본이 한국전쟁 중 우리 행정력의 공백기를 틈타 독도에 '일본령'이라는 한자표지를 세웠기 때문이다.
울릉도 주민 홍순칠은 울릉도 경찰서 장으로부터 지원 받은 박격포, 중기관총, M1소총 등 빈약한 장비를 갖추고 울릉도 전역군인들을 이끌고 독도의용수비대를 결성하여 독도에 주둔했다.
그 후 일본이 3척의 함대를 이끌고 이들을 위협했으나 이들에 의해 격퇴되었다.

(5) 최종덕
1965. 3 울릉도 주민으로 도동 어촌계 1종
llllllllllllll 공동 어장 수산물 채취를 위해 독도에 들어가 거주하면서 어로 활동
1968. 5 시설물 건립 착수
1981.10 독도를 주소지로 주민 등록 등재
1987. 9 사망
1980 년 일본이 독도 영유권을 다시 주장하고 나오자 "단한명이라도 우리 주민이 독도에 살고 있다는 증거를 남기겠다"며 울릉읍 도동 산 67번지 서도 벼랑어귀에 주민등록을 옮긴 최종덕씨의 독도사랑정신은 독도를 가본 사람이면 누구나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다.
그는 수중창고를 마련하고 전복수정법, 특수어망을 개발하여 서도 중간 분지에 물골이라는 샘물을 발굴하는 등 초인적 노력을 쏟으며 살다 1987년 생을 마쳤다.

(6) 조준기
최종덕씨의 사위로 울릉도 주민이었던 조준기씨는 장인의 뜻을 이어 지난 86년 7월 독도로 전입해 수산물 채취권을 이어 받았다. 조준기씨는 92년에 강원도 동해시로 이주하여 독도노래방을 경영하고 있다.

(7) 김성도
현재의 거주자
1991.11 주민 등록 전입 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 Top

2. 독도와 함께사는 사람

독도에도 사람이 산다. 서도에는 1가구의 주민이 거주하고, 동도에는 34명의 독도 경비 대원이 생활하고
있다. 독도에 처음으로 주민 등록을 옮겨 거주한 사람은 최종덕씨이며, 그 후 사위 조준기 부부가 뒤를 이어 거주하다가 몇년 전 전출하였고, 지금은 김성도씨부부 1가구가 전입하여 어로 활동을 하며 거주 하고 있다.
독도 주변의 해역은 한류와 난류가 교차하는 수역으로 어족 자원이 풍부한 황금 어장이다.
이곳은 울릉도 어부들의 문전옥답으로 우리 조상들이 대대로 활발한 어로 활동을 해 온 곳인데 1965년3월부터 도동 어촌계 1종 공동 어장으로 지정되어 이 곳에서 어부들이 고기를 잡거나 수산물을 채취하여 소득을
크게 올리고 있다.

독도에도 주민이 있다.
거주목적:공동어장 140 ha의 수산물 체취
연간 수산물 생산량10t (전복,소라,해삼 등으로 연간 6천만 원 소득)
연간 입어료 2백만원

독도는 동해안의 어업전진기지 이다.
울릉도와 독도의 주변 바다는 한류와 난류가 교차하는 곳으로 연안 어장과 대화퇴어장이 형성되어 있다.
이곳은 오징어를 비롯한 해산물 등의 어족 자원이 풍부한 동해안의 어업 전진 기지로서, 이곳에서 조업한 어획량이 우리나라 수산물 시장의 수급가격을 좌우하기도 한다.
특히, 독도 근해는 청정수역이며, 관공 및 해저지하자원 개발 등 그 가치가 매우 크다.

독도 근해의 주요 어장
1.독도 연안어장
2.대화퇴 어장

독도 근해의 주요 어획물
전복, 소라 ,해삼, 미역, 다시마 , 김 ,밥고동등
문어, 상어, 물개, 가오리 ,과어류, 열어, 홍게, 새우등
독도 어장, 대화퇴 어장에서 우리나라 어획량의 60%잡음
우리 나라의 어획량은 연간 20만t(선어 18만 t, 활어 2만 t)

독도 어장의 특색
1.청정 수역
2.한류와 난류가 교차하는 지역
3.울릉도, 독도 주변에서 해산물이 다양하게 많이 잡힘
4.오징어를 비롯한 풍부한 어류가 서식하는 동해안의 어업 전진 기지
5.독도 어장에는 경상 북도, 경상남도 ,강원도, 부산 등 4개 시/도 의 어부가 조업
6.경상북도의 어선은 포항에서 20-150t급 200여척 출어
7.여름에는 제주도 해녀들이 전복과 소라채취

독도 근해의 중요성
1.다양한 해저지하자원
2.조업 어선의 보호처 -태풍의 피항지, 어선의 보급,휴식처
3.관광지
4.독도 어장의 어획량이 국내 수산물 시장의 수급과 가격 좌우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l Top

3. 독도를 푸르게 가꾸는 사람
우리나라에서는 1948년 7월부터 계속하여 독도에 대한 학술 조사를 계속하여 왔다. 1981년에는 제4차 학술 조사 연구를 하요 '울릉도 및 독도 종합 학술조사 보고서'를 펴냈다.
독도를 푸르고 아름답게 가꾸기 위하요 많은 사회 단체들이 노력을 기울여 왔으며, 이러한 노력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이들 단체들은 지금까지 10,000여 그루의 각종 나무를 독도에 조림하여 500여그루나 살리는 성과를 거두었으며, 1996년 4월29일에는 '한국자생식물협회'에서 독도의 토양과 기후에 알맞은 꽃과 나무를 심기도 하였다

(1) 독도에 나무를 심게된 계기
섬은 해양법상으로 암초와 인공섬, 그리고 자연섬으로 구분된다.영토의 경계가 될수 있는 것은 자연섬 뿐이다. 자연섬으로 인정을 받기위해서는 그곳에 식수가 있어야 하고 나무가 자라야하고, 한 사람이 살아야 한다고 한다.
암초로 규정된 독도를 자연섬으로 전환시키기 위해 최종덕씨는 호적을 독도로 옮기고 물골의 물을 찾아내 독도 물을 마시며 독도의 첫 주민으로서의 표본을 보였다. 그후 1987년 최종덕씨의 사위 조준기씨 일가, 1987년 송재욱 씨, 김성도 선장등이 독도의 동도로 호적을 옮겼다.
이제 남은 일은 나무를 심는 일이었다. 그 마지막 조건을 완성시키겠다는 모임이 곧 이덕영 씨를 포함한 울릉도 청년들을 주축으로 한 '푸른 독도 가꾸기 모임'(1989년)이다.
물론 그 이전(1982년)에도 울릉애향회, 울릉산악회 등의 단체들이 나무를 심기 시작했다.

(2) 독도 가꾸기에 앞장선 단체들
1973-1979 :울릉도 애향회
1988:울릉도 산악회
1989:울릉군
1990:독도 사랑회
1992-1996:푸른울릉, 독도 가꾸기모임

(3) 독도의 조림 실적
해송-8,990, 향나무-289
섬괴불-420, 동백나무-951
후박- 540, 보리장- 287
기타- 54

(4) 독도에 우리꽂을 심는다.
한국자생식물협회:
-대학교수 ,노원경영자, 일반인 등 650여명
-1993년부터 독도의 생태계 연구및 자료 수집염분에 강하고 바위 틈에 자랄 수 있는 자생화 3만 그루보유
-1996년 4월 29일
-술패랭이,기린초,해당화,해국,백리향,참나무,벌개미취울릉국화,감국 등

(5) 독도 나무심기 단체의 활약상
독도의 기후나 토양이 워낙 척박한데다 설상가상으로 육지에서 방목한 토끼들이 번식에 성공하여 어린 묘목들을 깡그리 먹어치우곤 했다.
나무를 심는것이 주목적인 푸른독도 가꾸기 모임에서는 정기적으로 입도하여 한편으로는 토끼를 잡으면서 대규모의 식수를 하고, 피눈물 나는 정성으로 심은 나무들을 관리했다.
그 결과 1994년 현재 1천5백그루의 나무가 단단히 뿌리내리고 있다. 이들의 노력이 결실을 맺어 자연섬으로 독도가 공인되는 날, 우리는 독도가 포함된 동해안의 200해리의 바다를 우리의 영해로 갖게된다llllllll Top